한국이 불편한 나라가 되고 있다

최근 일부 언론에서 병력 부족을 이유로 여성 징집제도를 노골적으로 거론하며 여론을 조성하고 있다. 그런데 그 태도가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다.

우리 사회가 여성 강제 징집 제도를 실시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적으로 주어진 남녀 신체 조건의 다름과 형평성에 기인한다.

여성들은 같은 신체 조건에서 신체적으로 남성보다 뒤떨어진 근육 체계를 가지고 있다. 여성을 전쟁터로 내몰았을 때, 상대방 군대도 여성으로만 구성된 부대라면 몰라도, 신체적으로 불균형적인 열세 조건은 전쟁 수행 단계에서 최고의 약점이다. 그래서 자원 병력에 한해서만 군 복무를 허용하는 자연의 순리를 따르고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인류의 번식을 위해 여성들이 안고 있는 천형의 신체 조건 문제다. 남성이 군복무를 하지 않는 대신 여성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다른 짐을 지고 있다. 게다가 그 임무를 위해 노년기가 되기 전까지 매달 불편한 생리를 겪어야 하며, 그에 따른 개인 비용 또한 스스로 부담해야 한다. 물론 가난한 걸 증명하면 국가에서 무료로 지급하기도 한다.

요즘 젊은 기자들의 주장대로 여성도 병역 부담을 해야 한다면, 남성들은 그에 상응하는 어떤 부담을 추가할 것인지도 함께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똑같이 병역을 부담해야 하는데, 출산까지 해야 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남성들 역시 그만한 부담을 지는 게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여성들의 천형에 대응할만한 남성의 부담은 병역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남성들은 군 제대 후 인공 자궁을 부착하는 수술을 해야 한다는 입법을 한다면 모를까, 어떤 방식으로도 그 형평성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실이 이런데도 여성에게 '평등'이라는 단어를 앞세우는 것은,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교활한 수사다. 남성의 병역 부담을 '남성만의 병역 부담'으로 치환하는 잔머리라면, 더 근본적인 부분에도 같은 이해를 가져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병역 문제 관련해 진정으로 노력해야 할 부분은 긴장 해소를 통한 병역 자원의 감소 작업이다. 그러한 접근의 첫 출발은 이웃 국가들과 사이 좋게 지내는 것이다. 단순히 생각만 바꾸면 된다.

1945년의 일본 국민 시절에는 미국과 전쟁을 하는 자원으로 나가 죽는 게 아무 문제도 아니고, 1950년의 북한과 전쟁에서 죽은 것은 문제라는 주장은 해괴한 발상이다.

이런 어긋난 정의는, 한국인을 '쪼다 민족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게 한다. 그렇다고 일본과 계속 앙숙 관계로 지내자는 말은 당연히 아니다. 최소한 일본을 '아버지의 나라'로 삼는 것은 지나친 수치라는 의미다. 관계는 지금처럼 정상화하되 기본적인 엄격함은 있어야지, 내 땅의 여자들을 노리개로 삼은 상대국에 헤벌레한 모습은 비웃음의 대상이다.

그런 사람들이 북한에게는 긴장 조성을 위한 온갖 폭언과 조롱을 일삼고 심지어는 전쟁을 획책한다. 이게 쪼다가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일본과 사이 좋게 지내는 만큼 북한과도 사이 좋게 지내면 된다.

5.18 광주를 생각해 보자. 경상도인이 전라도인을 죽이는 것은 보호받는 내용이고, 북한이 일으킨 전쟁으로 남한인이 죽게 된 것은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인가?

한국인이 돈을 받고 베트남인을 죽인 것은 괜찮은데, 북한이 일으킨 전쟁으로 남한인이 죽게 된 것은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내전인 상황을 국제전으로 확전시켜 수백만 명의 사망을 불러온 것은 우리의 책임이고, 구체적으로 남자들의 책임이다.

이상하게 구분된 가치관을 정의라고 하지 말고, 일본에 한 것처럼, 그냥 사이 좋게 지내면 된다. 간단한 문제를 두고 병역자원이 부족해 여성을 징병해야 한다는 주장은 부끄러운 내용이다.